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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교회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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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3년 3월호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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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무리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일하지만 인기 경연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무엇을 믿는가

남은 교회와 사명


영적 엘리트 집단이 아니다

남은 교회와 하나님의 사명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위태로운 상황’, ‘핵으로 인한 소멸의 가능성’, ‘생태계 위기로 인한 대규모의 살상’, ‘대규모 기근과 인구 과잉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들’, ‘불확실한 정치, 사회, 경제 상황’, ‘편만한 종족, 국가 간의 소요’, ‘전례 없는 불안정과 불안’ 그리고 ‘생명을 보호하고 존재를 보존하려는 강력한 요구.’ 오늘 일자 뉴욕 타임스의 우울한 기사들일까? 아니면 유엔에서 최근에 전한 연설인가? 아니다. 이 표현 모두는 재림교회 학자 게르하르트 하젤이 반세기 전에 진술한 긴 문장에서 언급된 것들이다.1


자신의 저술 『남은 무리』에서 하젤은 남은 무리의 개념을 인간 역사의 초기부터 추적했다. 남은 무리 개념은 사람들이 삶의 위협을 느끼는 결정적인 순간에 표면으로 드러난다고 그는 논증했다.2 불확실과 혼돈의 시기에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길로 돌아서라는 절박한 선지자적인 호소”만이 유일한 생존 근거이다. 만일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우리는 “남은 무리의 일원이라는 확신 속에서 참된 안정, 실제적인 평안, 진정한 사랑, 지속적인 소망”3을 얻을 것이다.


클럽이 아니라 촉매다

하젤이 그런 진술을 한 지 50여 년이 지났고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소망과 확신이 필요하다. 남은 무리는 자신들의 필요와 위로와 안전에만 몰두하는 배타적인 종교 클럽이 아니다. 남은 무리는 다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얻는 비밀번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남은 무리는 성경 진리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내면에 집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진리를 전하고 보여 주는 데 열정적이다. 남은 무리는 엘리트를 표방하는 영성 클럽이 아니라 세상을 축복하고 변화시키고 사랑하기 위해 세상 안에 거하는 인간 촉매에 더 가깝다. 그들은 온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소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입증하는 촉매제들이다. 오래전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남은 무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곳으로 보냄 받는 모습을 묘사했다. 그들의 과업은 “나[하나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사 66:19)하는 것이다.


성경의 남은 무리는 그저 말과 독특한 교리들로 그 영광을 선포하지 않는다. 남은 무리는 자신들이 사는 방식을 통해 그 영광을 입증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에 지쳤다고 성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대의 남은 무리에게 거듭거듭 전하고 있다. 그분은 변화된 삶을 보길 원하신다. 아모스 선지자는 “요셉의 남은 무리”를 꾸짖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직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잘못 대했기 때문이다(암 5:7, 12, 15). 마찬가지로 스가랴 선지자는 남은 무리에게 저주를 발했는데 그들이 주변의 고통당하는 자들을 외면하고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슥 7:9~10; 8:12).


그러나 스가랴는 만일 남은 무리가 행실을 바꾼다면 뭇 나라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슥 8:13). 그 복은 뭇 나라에서 다른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렬에 서게 할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광경을 마음에 그리면서 스가랴는 이같이 말한다. “그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슥 8:23). 


그것은 남은 무리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이상이다.


남은 무리의 저항

또 성경의 신실한 남은 무리는 자신을 에워싼 문화적·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는다. 흐름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는 연어처럼 남은 무리는 흐름에 저항한다. 이 무리는 하나님의 가치를 반대하는 지배적인 교리 체계에 저항하고 맞선다. 남은 무리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일하지만 인기 경연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의 남은 무리가 부패, 배도, 박해에 둘러싸여 있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사명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신실하게 지니고 있다(계 12:17). 이 묘사는 요한계시록 14장의 세 천사 기별 바로 뒤에서도 발견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하나님의 방식을 반대하거나 무시하는 자들 앞에서도 남은 무리는 굳게 헌신하며 인내한다. 


남은 무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는 교리와 제도에 맞서는 운동과 같다. 나는 네덜란드인 재림교인 사업가 욘 베이드너르를 기억한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위해서 도피로를 운영했다. 게슈타포가 그를 옥에 가두고 고문해 주기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겪었지만 그는 유대인 수백 명을 구출했다. 악의 세력에 용감히 저항했기에 그는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여러 메달을 받고 의로운 이방인이라고 인정받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세계 기념센터 야드 바셈에는 그를 기리는 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다. 


요한계시록의 신실하고 저항하는 남은 무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애를 산다. 그리고 남은 무리는 열정적으로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또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 깨어 있으라고 외치며 거짓된 경배 시스템은 결국 무너진다고 경고하면서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세 천사와 함께한다(계 14:6~11).


1903년 미국 메릴랜드주 터코마파크에서 개최한 대총회에서 이 사명은 미국 재림교인들의 마음 가장 높은 곳을 차지했다. 그때 재림교인은 전 세계에 7만 8,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기독교 교파에서 나온 얼마 안 되는 남은 무리였고 자신들을 “작은 무리”라고 불렀다.


그들의 등장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선한 이웃임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었지만 그들은 주류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에 저항했다. 그들은 금연, 채식, 금주를 실천하는 건강 개혁자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 반대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제칠일에 예배했다. 그들이 사랑하는 하나님은 죄인들을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게 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 목록은 계속된다. 몇 년 뒤 『워싱턴 포스트』지의 저널리스트 니콜 아서는 재림교인들을 “적지만 위협적”이라고 묘사했다.4


그것이 신실한 남은 무리의 전모이다. 남은 무리는 반문화적이고 저항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지역 사회에 복이 되면서도 기존의 행동 방식을 허물어뜨린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신실하게 남아 있으면서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한다. 그 메시지는 시대에 적절하면서도 시대를 초월한다. 그리고 다시 게르하르트 하젤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면 그것은 “참된 안정, 실제적인 평안, 진정한 사랑, 지속적인 소망”을 제공하는 유일한 메시지이다.


1 Gerhard F. Hasel, The Remnant: The History and Theology of the Remnant Idea from Genesis to Isaiah (Berrien Springs: Mich.: Andrews University Press, 1972), p. vii

2 Ibid., p. 402

3 Ibid., p. 403

4 Nicole Arthur, “Weekend’s Guide to Takoma Park,” The Washington Post, April 16, 1999, pp. 25,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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